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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1 600년이 불타다 by 휘연 (3)

600년이 불타다

불타는 숭례문

(c)2008 한국일보. 사진의 저작권은 한국일보에 있습니다.

어제 저녁때 뉴스가 나오긴 했습니다만, 불길이 다 잡힌 것 처럼 이야기 해서 별거 아닐 줄 알았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를 보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누각이 완전히 탔더군요. 다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명색이 소방서에 일하는 사람으로서, 할 말이 없습니다. 다 제 잘못인 것 같고, 제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한 주의 새 시작이니까 힘내야겠는데, 있는 기운이 다 빠져나가니 말입니다.

제대라도 한 뒤라면야 욕이라도 하겠지만 지금은 그냥 말문이 턱 막히네요.

불탄 이유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발화 지점에 전기 시설이 없었고, 목격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거의 방화인 것으로 결론이 나는 모양이고, 빨리 대처하지 못한 문화재청이나 서울시, 서울소방본부에는 욕이 바가지로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정말 방화라면 방화범은 반드시 잡아서 법대로 처리해야 할 것이고, 관리에 이런 저런 허점을 노출한 관계기관도 한 소리 크게 들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것이, 아는 범위 내에서 제 눈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서울중부소방서와 진압대장에게 화가 가장 크게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소방대는 그냥 화재 나면 가서 물만 뿌리는 조직이 아닙니다. 지휘관이 있고 책임소재가 명확히 귀속되는 체계가 있으며, 화재 유형과 현장 상황에 따라 적용되는 필드매뉴얼이 작성되어 있습니다. 4주 기본교육만 받고 바닥에서 2년동안 잡부노릇만 하는 저도 2년동안 들은 풍월이 있어서 목조건물의 경우 지붕 부재에 붙은 불은 밑에서 방수하면 불길이 안 잡히니 위에서 방수해야하고, 전통가옥은 불나면 일단 기왓장부터 다 뜯어내야 한다거나 하는 기초적인 지식을 알고 있습니다. 소방공학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잘 정립되어있는 학문이고, 현장 지휘관 정도 되면 이런 것에 대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소방관들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전문적인 직종입니다.

그래서 더 화가 납니다.

국보라서 섣불리 손대기 어려웠겠지요. 혹시 괜히 손댔다가 피해가 커지면 그 불똥이 자기한테 튀니까 몸을 사렸겠지요. 문화재청 관계자랑 연락하고, 협의하느라 시간이 걸렸겠지요. 하지만 그 복지부동때문에 원칙이 적용되지 못했고, 그동안 누각은 안에서부터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때늦기 전에 정석대로 빨리 기와를 걷어내고, 위에서 방수했으면, 목재가 전부 젖어서 어차피 전면수리가 필요했을지라도, 600년 된 국보가 모두 타는 건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책임자들이 몸을 사렸기 때문에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 비극이 되어버렸습니다. 뉴스를 보니까 21시에 출동해서 24시가 다 되도록 지붕 기와 뜯는 걸 가지고 문화재청이랑 협의가 어쩌니 하면서 미루고 있었다더군요. 매뉴얼에 따라서 진압작전을 폈더라면,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적어도 지금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압니다. 문화재에 화재가 발생하면, 소화약재나 소화용수에 의한 수손(水損) 피해가 화재 자체의 피해보다 더 커지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에 더 조심스러워야하고, 빠르게 대처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더 원칙에 충실했어야합니다. 애초에 현장을 확인한 시점에서 화점이 지붕 밑이란 사실을 몰랐을리 없습니다. 거기다가 밑에서 아무리 물을 뿌려봤자 소용없다는 거,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수손 피해는 어차피 나는데, 빨리 화점을 잡아서 진화해야지, 변죽만 울리고 있으면 되나요. 지붕 안 뜯고 주변에 물을 뿌리면 수손 피해가 안 나기라도 한답니까.

물론, 저는 언론에 공개된 외에 거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그나마 두세번 필터링 된 이야기를 가지고 재구성하기 때문에 제 분석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일이 크기 때문에 더 섣불리 말하기 힘들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양간은 소를 잃기 전에 고쳐야하니까, 여기서 무조건 소방서를 욕해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일단 화재가 발생하면, 그걸 제때 진압하지 못하는 건 소방서의 책임입니다. 바보가 아니라면, 일개 의무소방도 알고 있는 목조건물의 화재진압 원칙을 몰랐을리 없습니다. 당신들이 몸을 사리고 있는 동안에 600년의 역사가 전부 불타버렸습니다.

허탈하고, 허망하고, 수치스럽습니다. 국보가 미친 놈 불장난에 스러졌습니다. 그리고 그 화마가 천천히 건물을 삼켜가는 동안 소방대는 손놓고 있었습니다. 제가 죄인인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나중에 후손들에게 뭐라 말해야 할까요.

Posted by 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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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s List

  1. 이게 다 누구 때문이야

    Tracked from The Labyrinthine Library 2008/02/11 14:10 Delete

    한나라당의 논평도 웃기고, 그 논평에서 그 부분만 삭 빼내서 섹시한 제목을 달아준 기자놈도 웃기고, 거기에 낚여서 퍼덕대는 네티즌 꼴을 보고 있는 것도 웃깁니다.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라..

  2. 마지막으로 정리

    Tracked from The Labyrinthine Library 2008/02/12 11:55 Delete

    이번 숭례문 화재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이번 사건을 둘러싼 여러 논평들, 그리고 그에 대한 저의 코멘트입니다. 짤막짤막한 꼭지 몇 개를 모아놓은 것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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