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영화를 봐서 들어갈 때 까지만 해도 별로 많아보이지 않았는데, 영화를 보고 나오니 사람 피해다니는 것이 큰일일 정도로 사람이 와글와글합니다. 마침 그날이 놀토였는지 사복차림의 중학생 또래도 많이 보였고,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도 많더군요.
V의 행동이 기본적으로 복수심에 근거한 것이니 혁명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실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건 별로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죠. 그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을 했건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두 시간이라는 영화적 제약이라고 생각하죠. 아담 서틀러 의장과 그 정권은 헐리우드의 상상력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악에 가까운' 독재정권의 이미지를 가감없이 보여줍니다. 일견 조지 오웰의 1984와 비슷한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죠. 훨씬 더 허술하고, 훨씬 경박합니다. 독재자라는 작자는 자기 신변이 걱정되어서 안가에 틀어박혀 스크린 속에서만 떵떵거리는 인간이고, 그것도 엄청나게 허술한 장치--어떻게 자기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인간을 그렇게 쉽게 믿고 그의 인간에게 몸을 맡깁니까--에 불과하죠. 그건 1984의 대형과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가이 폭스를 주인공의 마스크로 활용한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도대체 '가이 폭스'와 '독재정권에 대한 반대'가 어떤 접점에서 이어지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V가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투사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보여주어야 할 것은 두 가지 입니다(관객에게, 그리고 나아가서는 영화 내부에 존재할 인민들에게 말이죠). 하나는 그의 행동이 확실한 신념과 도덕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그가--어차피 진짜 얼굴을 드러낼 수 없을테니--보여주는 마스크가 그 이미지를 강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거죠. 영화 내내 드러나는 V의 편집증적인 모습이나 자신의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이비를 고문하는 것(이 부분에서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런 더러운 폭력을 써도 되는 것인가요?), 그리고 가이 폭스라는 마스크는 두 가지를 전혀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영화는 말하고 싶은 내용을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떠벌리고 있습니다. 무언가 감추어져있을 게 없서요. "독재는 나쁘다." "모두가 신념아래 하나될 때 혁명을 이룰 수 있다." 써 놓고보니 두번째 문구는 이 자체로서 굉장히 파시즘적이기도 하네요. 하지만 결론을 보면 허무하기 그지없습니다. 영화적 장치는 무시하고 지나가더라도, 당장 정부의 수뇌부가 몰살당해버렸고, 국회 의사당이 날아갔습니다. 영화는 이걸로 끝입니다. 정말로 끝입니까? 현실이라면 이걸로 끝일까요?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그게 희망이라면 우리나라는 박정희가 죽었을 때 군부독재가 끝났어야 합니다. 실상은 어떻습니까. 준비되어있지 않은 혁명은 혁명 이전보다 더 고통스러운 미래를 안겨줄 뿐입니다. 영국의 인민들이 독재를 증오하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어떤 확실한 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 다음날 부터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과 전혀 다를바 없는 일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결말은 이비의 마지막 대사보다 더 몽환적입니다.
굳이 하나 정도 생각할 거리를 찾아보자면 이게 되겠군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 정당한가." V는 이비에게 자신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말그대로 문자적으로, 이비를 잔인하게 고문합니다. 그게 과연 정당할까요? 사실 영화를 반추해보면 V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애꿎은 사람을 상당히 많이 괴롭힙니다. 그 때문에 죽은 사람만 따져봐도 한 다스는 나올걸요. 물론 무언가 큰 변화를 꿈꾸는 사람이 그 것을 이루기 위해서 딱 자신이 타도하려는 대상만 골라서 타격을 줄 수는 없겠지요. 그런 이상적인 일은 꿈에서도 힘들 겁니다. 하지만, V의 방법론이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건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이 영화가 혁명을 위한 교과서다, 무언가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저는 별로 그 이야기에 찬성하지 못하겠습니다. 영화 자체의 내용을 놓고 보자면, 이건 메트릭스--이것도 워쇼스키 형제의 작품이군요--처럼 무언가 있어보이려는 작품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영화관에 들어가서 그 분위기 철철 넘치는 영상과 영국식 악센트에 열광하다 나오면 됩니다. 그 뿐입니다. 무언가 생각해보고 싶습니까? 그럼 요 바로 윗 문단에 대해서 좀 생각해 봅시다. 그게 영화가 던지려는 화두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덧붙임 하나. 배트맨도 그랬습니다만,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력이 필수적인 것 같네요. 수십만 개의 가이 폭스 마스크와 망토, 지하철 복구 비용, 기타 여러가지. 못해도 수 조 원은 들겠습니다.
덧붙임 둘. 재미있는 건, 그들이 정권을 잡는 방법이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에 나오는 친구의 그것과 굉장히 유사하단 겁니다. 우라사와 나오키가 V for Vendetta 만화를 참고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 근래 개봉한 영화 중에서는 "시리아나"가 재미있어 보이네요. 캐스팅도 호화롭고. 꼭 봐야겠습니다.